"격변의 시대에 미래는 지속적으로 배우는 사람들이 상속할 것이다. 배움을 멈춘 사람들은 대개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에서 살아갈 채비를 한다." -에릭 호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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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말 학교에 가야하는데 저번 학기 빵구를 때워야 하는데 교준이가 오늘 시험 못보면 큰일 난다고 했는데 그래서 밤새 안하던 공부도 했는데. 아침에 비를 보고 억지로 달래가며 학교에 가는 길에 차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의 소리로 밤새 외운 민족사도 이번 학기 학점도 어제밤의 중요성은 빗소리에 밀려나고 결국 차를 세우고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빗소리는 기억 밖으로 밀어내었던 어느 얼굴과의 얘기를 지나간 영화 필름처럼 잘 보관된 상태로 어려움 없이 보여준다. 너무 선명해 짜증이 난다.
비가 왔습니다. 그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이렇게 아침을 맞는 날에는 내 안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또 하나의 내가 나를 지배합니다. 그러면 나는 너무도 무기력하게 그가 하고 싶어하는 데로 몸을 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교준이가 밤을 새워 만들었다는 컨닝 페이퍼도 잠을 쫓으며 억지로 머리 속에 집어넣었던 민족사도 이번 학기 학점도 날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가 그딴거 개나 줘버리라며 학교로 가는 나를 신촌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생각에 잠긴 사이 빗방울은 작아졌고 멀리서 해가 올라오고 있는데 어느새 그리움에 젖은 눈은 비가 남기고 간 여운으로 기어이 물방울을 만들었습니다. 역시 비가 쥐약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미련스러울 필요는 없는데 뭘 어쩌겠다고 달랠 자신도 없으면서 지난 얘기로 마음안을 온통 들쑤셔 놓았는지 술 마시기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는데. 술이 고파왔습니다. 신촌을 걸었습니다. 골목 골목을누굴 찾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걸었습니다. 난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신촌은 여전했습니다.반팔 T를 선물로 받았던 옷가게도 골뱅이와 족발을 먹던 포장마차도 은목걸이를 사 주었던 그 악세사리점도 여전했습니다. 어디 좋은 술집 없나 두리번거리다 장난으로 여관 간판을 보고 저기 가자 했을 때 그 밑 주점 간판을 보고 그래 저기 괜찮겠다 들어가자 했던, 그래서 우리를 그 자리에서 한참 웃게 만들던 그 여관 간판도 그대로였습니다.
다시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엔 한참 내릴 굵은 비였습니다. 신촌이 어수선해지고 환하게 웃으며 뛰어가는 여고생들, 우산을 피는 연인들, 처마 밑으로 숨는 아저씨들, 리어커를 옮기는 행상들, 모두 분주히 움직이는데 난 그럴 이유가 없었습니다.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뭘 살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정해진 아무것도 없었기에 계속 비오는 신촌골목을 여행했습니다. 외로웠습니다. 특별히 느낌을 표현하기 힘든 그저 참시린 느낌이었습니다. 비를 피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더 비를 맞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왜 이렇게 비를 맞고 다니냐고 우산을 씌워 줄 것 같아, 나처럼 외로운 눈에 빗물을 가득 담아 가슴에 안겨올 것 같아 어디로도 비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신촌의 거리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더 이상 걷는 것이 힘들어져 가까운 주점으로 들어갔습니다. 소주 냄새가 진하게 풍겨있고 축축한 분위기로 가득 찬 안에는 한두곳 비를 피해 들어온 것 같은 연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어깨를 기대고 사진이라도 찍어주고 싶은 모습으로 다정히 술잔을 비우고 있었습니다. 안주를 많이 시켰습니다. 주인이 이상하게 쳐다볼 정도로 대여섯 명이 앉는 테이블 가득 안주를 주문했습니다. 그러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서 좀 덜 외로울 것 같아서 소주 한 병과 잔 재털이를 빼고 테이블 모두 안주로 채웠는데 생각대로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술이 달았고 그래서 계속 넘겼습니다. 하루 종일 한마디도 안해서 그런지 내 입술은 술잔과 담배 외에 어떤 안주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몇잔을 비우고 그때서야 몸이 좀 풀리는지 항상 내 방 턴테이블에 얹혀있던 김현식 형의 목소리가 들여왔고 오늘은 더욱 심하게 가슴속을 후벼팠습니다. 내가 이러고 있는 이유를 지울 수가 없어 주량을 잊고 계속 밀어 넣었습니다. 시간이 지났는지 하나 둘 연인들이 자리를 뜨고 나도 그만 일어서야 할 것 같았습니다. 맥주가 마시고 싶어졌습니다. 찬 맥주 거품과 같이 그리움을 삼켜버리고 싶어졌습니다. 맥주 캔 서너 개와 두 갑의 담배를 사들고 걷다보니 한동안 우리 집처럼 들렀던 밤색의 어느 아파트 앞이었습니다. 눈을 감았습니다. 밀려오는 많은 기억들이 몇 잔의 소주와 섞여가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와 얘기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아무나 붙잡고 내 얘기만 하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 것이고 살아오는 동안 내가 잃어버린 것들, 잃어버린 후에야 소중함을 알았고 다시는 그것들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이 너무 안타깝다고 오늘도 기분이 그런 날이라고, 이제 다시는 오늘 같은 날은 없을 거라고 얘기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누군가 왜 그랬는지 하루종일 어디를 돌아다녔는지 물어보았다면 그 기분에 기어이 대답했을 것입니다. 보고싶어 그랬다고. 한시간이라도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비가 이별 후의 시간을 오늘까지의 공백을 잊게 해, 찾아가 만나보면 다시 이어질 것 같았다고 왜 도 안 되냐고,그 동안은 참아 왔는데 오늘은 나 혼자의 힘으로는 무리가 있었다고 그래서..... 그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