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월성 [慶州月城] | |
동의어 : 반월성, 월성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도성(都城). 둘레 2,400m. 사적 제16호.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과 성안의 건물지가 있다. 이 성은 모양이 반달 같다 하여 반월성(半月城)·신월성(新月城)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곳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는데, 성안이 넓고 자연경관이 좋아 궁성으로서의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101년(파사왕 22)에 쌓은 것으로 둘레는 1,423보(步)라고 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궁성으로 월성을 쌓은 뒤 금성(金城)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 되었으며 나라가 커짐에 따라 부근 일대가 편입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문무왕 때 안압지(雁鴨池)·임해전(臨海殿)·첨성대 일대가 편입, 확장되는 등 신라의 중심지였다. 동서길이 900m, 남북길이 260m이며 성 안의 면적은 약 19만3845㎡나 된다. 성벽의 동·서·북면은 대체로 흙과 돌로 기초를 다져 쌓고 그 위를 점토로 덮었으며, 남면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거의 쌓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경잡기 東京雜記≫에 의하면 290년(유례왕 7) 큰 홍수로 인하여 월성이 무너져 이듬해 보수하였으며, 487년(소지왕 9) 다시 왕이 이곳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원래 월성 안에는 남문과 북문격인 귀정문(歸正門)·북문·인화문(仁化門)·현덕문(玄德門)·무평문(武平門)·준례문(遵禮門) 등의 문과 월상루(月上樓)·망덕루(望德樓)·명학루(鳴鶴樓)·고루(鼓樓) 등의 누각, 왕이 정사를 돌보던 남당(南堂 : 都堂), 신하의 조하(朝賀)를 받고 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朝元殿), 삼궁(三宮 : 大宮·梁宮·沙梁宮)을 관할하던 내성(內省)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1741년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 만든 석빙고(石氷庫, 보물 제66호)만 남아 있다. 또한, 경주석씨(慶州昔氏)의 시조를 모시는 숭신전(崇信殿)도 있었으나 1980년 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 남쪽으로 옮겨졌다. 쪽의 명활산성(明活山城), 서쪽의 서형산성(西兄山城, 일명 仙桃山城), 남쪽의 남산성(南山城), 북쪽의 북형산성(北兄山城)이 나성(羅城)으로 호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석탈해가 원래 호공(瓠公)의 거주지인 이곳을 거짓꾀를 부려 호공을 몰아내고 차지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참고문헌≫ 三國遺事 ≪참고문헌≫ 世宗實錄地理志 ≪참고문헌≫ 大東地志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참고문헌≫ 文化財大觀 下-史蹟篇-(文化財管理局, 1976) ≪참고문헌≫ 全國邑城調査(文化財管理局, 1985) ----Copyrigh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천마총 [天馬塚]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지구에 위치하는 신라의 무덤. 제155호 고분이라고 불려왔으나 1973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발굴조사 결과 무덤 안에서 자작나무껍질에 채색으로 천마(天馬)를 그린 말다래[障泥:국보 제207호]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고 명명되었다. 거대한 봉토로 덮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서 봉토의 바닥지름은 47m, 높이는 12.7m에 달한다. 무덤의 축조방법은 먼저 지면을 고른 뒤 바깥둘레돌[外護石]을 돌리고 그 안에 점토와 자갈을 다져쌓기[版築]해서 올린 후 여기에 덧널[木槨]을 동서방향으로 설치하고 덧널 주위에 돌무지를 쌓은 뒤 봉토를 씌운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인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와 유사하며 다만 덧널이 지면보다 위에 있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덧널 위와 주변에는 지름 23.6m, 높이 7.5m 가량 돌을 쌓고 표면에는 방수를 목적으로 점토를 발랐다. 덧널 내부에는 강돌과 잔자갈로 석단(石壇)을 돌리고 그 위에는 유물을 배열했으며 석단의 내부에 길이 215cm, 너비 80cm 가량의 널[木棺]을 덧널의 장축방향에 맞추어 동서방향으로 안치했다. 석단의 바깥쪽에는 널과 직교하여 남북방향으로 껴묻거리 상자를 놓았다.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는 6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껴묻거리는 위치에 따라 봉토 내부, 덧널 상부, 널 주위의 석단 윗면, 널 내부, 껴묻거리 상자 등으로 구분된다. 봉토 내부의 유물로는 정상부 근처에서 마구류로 추정되는 금동판(金銅板)·미늘쇠[有刺利器]·쇠낫[鐵鎌]·쇠투겁창[鐵]·유리구슬[琉璃玉] 등이 출토되었다. 덧널 상부 출토유물로는 쇠도끼[鐵斧]와 굽다리접시[高杯]·뚜껑접시[蓋杯]·목단지[長頸壺]·단지[短頸壺] 등의 토기류, 금제 굵은고리, 가는고리귀걸이, 유리구슬 등과 대형환두철봉(大形丸頭鐵棒)·환형철구(環形鐵具) 등이 있다. 널 주위의 석단에는 동쪽에 관모(冠帽)·허리띠[帶]·띠드리개[腰佩] 등의 장신구류, 나머지 부분에는 무기와 마구류가 부장되어 있었다. 널 내부에는 금관(金冠), 목걸이[頸飾], 금제허리띠[金製帶]와 띠드리개, 금제·은제 팔찌, 금제반지, 봉황환두대도(鳳凰環頭大刀) 등을 패용, 착용한 인물이 머리를 동쪽으로 향한 채 반듯이 눕혀져 있었다. 껴묻거리 상자에는 다량의 유물이 들어 있었는데 뚜껑으로 생각되는 판재의 윗면에는 금제새날개모양관장식[金製鳥翼形冠飾]·금박편(金箔片)·금동관(金銅冠)·금동제관모(金銅製冠帽)·금동제정강이가리개[金銅製脛甲]등이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서는 재갈[]·발걸이[子]·말띠드리개[杏葉]·밑동쇠[座金具]·말띠꾸미개[雲珠]·청동말종방울[靑銅馬鐸]·안장틀[鞍橋]·말다래 등의 각종 마구류와 투구 1점이 상단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세발솥[鼎], 자루솥[斗], 다리미, 크고 작은 합(盒), 굽다리접시 등의 금속제용기와 유리용기, 각종 칠기류가 빽빽이 차 있었다. 상자 아랫면은 4점의 쇠솥[鐵釜]이 받치고 있으며 쇠솥이 없는 곳에는 각종 토기류가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관련 자료(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B&i=188173&v=45) Copyright ©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석빙고 [慶州石氷庫]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빙고. 보물 제66호. 1738년(영조 14) 부윤 조명겸(趙明謙)이 목조의 빙고를 석조로 축조하였다가 4년 뒤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는 빙고 입구 이맛돌에 '숭정기원후재신유이기개축'(崇禎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고 새겨진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월성 북쪽의 둑을 잘라서 남쪽에 입구를 내고 안으로 바닥을 경사지게 했으며 바닥 중앙에 배수로를 만들어 물이 밖으로 빠지도록 했다. 내부는 동서로 홍예(虹霓) 5개를 틀어올리고 홍예 사이에 장대석을 걸쳐서 천장으로 삼았으며 북쪽 벽은 수직으로 쌓았다. 천장에는 배기공을 3곳에 두었는데 지금의 배기공 위에 있는 석재는 근래의 수리 때 놓은 것이다. 출입구는 너비 201cm, 높이 178cm로 만들고 계단을 설치하여 밑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했다.밑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했다. 현재 영조 때 만든 석빙고가 여러 곳에 남아 있으나 그중에서도 경주 석빙고가 가장 완벽하다. 안압지 [雁鴨池]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연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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