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시대에 미래는 지속적으로 배우는 사람들이 상속할 것이다. 배움을 멈춘 사람들은 대개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에서 살아갈 채비를 한다." -에릭 호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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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도 오고 해서~ 갔습니다.

찜질방 양머리 너무 해보고 싶어서 쪽팔림 무릅스고,

저머리로 4시간동안 돌아다녔답니다. ㅎㅎㅎㅎ

얼굴보고 놀라시는 분들 많겠군요~ ㅋ

찜질방이란 곳 처음이였는데, 생각보다 잼있었습니다.

아~~ 새로운 경험~ ㅎ ^^

사자짱 얼굴이 궁금하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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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7 21:39 2006/05/07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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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들의 공채 시즌이 되면서 각종 이력서 작성과 관련한 서적의 판매고가 증가하고 인터넷에서 관련 사이트나 검색 조회수가 증가하고 있다. IT 기업들도 늦은 가을 무렵 이•전직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회사는 검토해야 할 이력서가 늘어난다. 이력서를 작성해야 하는 사람(구직자)은 좀 더 자신을 잘 표현하고 궁극적으로 취업에 성공하는 이력서가 어떤 것인 지 궁금해 한다. 모든 구직자는 ‘매력적인 이력서’를 만들고 싶어한다.

매력적인 이력서는 하나의 주제로 다룰 수 없다.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회사에 들어가려는 신입 사원을 위한 매력적인 이력서는 따로 있다. 한 업종에서 5년을 근무한 경력자가 만들 수 있는 매력적인 이력서는 또 따로 있다. 업종에 따라 직종에 따라 매력적인 이력서는 각각 존재한다. 이력서 쓰기도 일종의 기술이기 때문에 막연하게 모든 형태의 이력서에 적용되는 매력적인 이력서는 없다.

매력적인 이력서 작성의 세 가지 원칙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이력서를 작성하기 위한 절대적인 3가지 원칙이 존재한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둘째, 상대방은 누구인가?
셋째,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첫 번째 원칙은 이력서에서 표기할 자신이 누구인 지 명확히 판단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력서는 결코 한 인간에 대해 기술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이력서를 검토해 보면 의외로 이러한 기본적인 사항을 모르고 이력서를 작성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자기 소개서를 보면 이런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저는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로 시작하는 뻔하고 뻔한 자기 소개서를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자기 소개서를 보는 많은 인사 담당자들이 “이력서도 제대로 쓸 줄 모른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제의 핵심은 이력서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것 – 대개 그것을 진정함이라고 믿는다 – 을 소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두 번째 원칙은 첫 번째 원칙에서 출발한다. 그럼 이력서에서 소개하는 ‘나’는 도대체 어떤 것인가? 바로 그 이력서를 읽는 상대방이 누구인가에 따라 ‘나’는 달라진다. 포탈 뉴스 사이트의 편집자로 지원하려는 경우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자신이 좋아하는 100가지 가운데 ‘포탈 뉴스 사이트 편집자’에 적절한 2가지를 기술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굳이 표현해야 할 필요가 없다면 쓰지 않아야 한다. 무상 진료 무상 치료를 가장 합리적인 의료 체계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그걸 굳이 적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원하려는 회사는 업종이 그것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면 자신의 생각을 적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세 번째 원칙과 곧장 연결된다.

모든 것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만 기술한다. 만약 지원하려는 회사가 PHP 3년 이상 경력을 원하고 자신이 그러한 경력이 있다면 가급적 상세하게 기술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PHP 경력은 C++을 전공하고 학습하는 과정에서 부가적으로 배운 것이라면 C++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을 것이다. 왜냐면 자신의 전문은 PHP가 아니라 C++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이력서 작성은 서류 전형에서 탈락할 수 있다. 비록 지원자의 능력은 뛰어나지만 회사가 원하는 것은 PHP 프로그래머지 C++을 전문으로 하는 PHP 프로그래머는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앞서 이야기한 3가지 원칙은 최종 원칙 한 가지로 수렴한다. 이력서 작성의 최종 원칙은 바로 이것이다,

“이력서는 면접을 위한 서류일 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이력서도 면접을 보게 만들어 줄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력서만 보고 사람을 뽑는 회사는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장 ‘매력적인 이력서’는 무엇이겠는가? 그렇다, ‘이 사람 정말 만나고 싶다’는 느낌을 주는 이력서가 가장 매력적이다.

인상깊은 이력서
내가 지금까지 본 이력서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이력서가 하나 있다. 우연히도 프로그래머로 지원한 사람의 이력서였는데 – 프로그래머에 대해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 정말 화려한 이력서였다. 그가 다룰 수 있는 랭귀지는 어셈블리/포트란/코볼/C/C++/VC/BC 등 수십 가지가 넘었고 OS 레벨의 프로그램도 가능하다고 적혀 있었다. ASP나 PHP등의 스크립트는 우습다고 이야기하고 있었고 자바 스크립트로 웬만한 서버 사이드 프로그램을 다 만들 수 있지만 그럴 필요가 있겠냐고 오히려 묻고 있었다. 오라클, DB2, MSSQL, MySQL 등등 못 다루는 DB가 없었고 각각 2년 이상의 아키텍터로서 경력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었다. A4지 4장에 걸쳐 기록된 그의 이력을 보고 나는 반드시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십여 차례 전화를 해서 그와 만나기로 했고 인터뷰 날짜까지 잡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오지 않았다.

만약 그가 정말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나는 개발팀 전원을 해고하는 한이 있더라고 그에게 고액의 연봉을 주고 채용했을 것이다. 이런 마음까지 들게 하는 이력서였으니 ‘매력적인 이력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게 거짓말인 것이 드러난다면 업계에서 매장당할 뿐만 아니라 그는 회사에 고소 당하고 피해 보상을 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매력적인 이력서’는 이런 것이 결코 아니다.

또 다른 내게 인상 깊었던 이력서가 하나 있다. 그 이력서는 우리가 요구하는 구인 조건에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당시 회사는 3년 차 정도의 웹 기획자를 뽑고 있었다. 조건은 50만 명 이상의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1년 이상 운영 경험이 있어야 하고, Linux 서버 기반의 메시징 애플리케이션 기획 경험과 개발자와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도록 관련 기술에 대한 지식 습득이 있어야 했다. 많은 이력서를 받았는데 유독 그 이력서가 계속 눈에 밟혔다.

이력서의 내용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에 대해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었다. 자기 소개서의 내용 대부분이 그러한 경력 기술과 그 과정에서 체득한 내용 그리고 자신이 이룩한 성과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력서를 검토하며 나는 마치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이미 이력서에서 우리가 질문한 것에 대해 충분히 답변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인터뷰를 하며 그는 자신의 경험 중 이력서에 기록하지 않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비즈니스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이력서에 기록하지 않았지만 어떤 회사에서 신규 사업 부문을 잠시 맡아서 꾸린 적도 있었다. 비록 그 결과는 좋지 않았으나 회사의 재무 재표나 IR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가 제안하는 채용 조건을 거의 다 수용하며 그를 채용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매력적인 이력서란 무엇인가?” 매력적인 이력서가 매력적인 인간에 대한 기술은 아님을 이제는 알 것이다. 우리는 연예인을 뽑으려거나 글을 잘 쓰는 사람을 뽑으려는 것은 아니다. 결국 매력적인 이력서란 인터뷰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이력서를 말한다. 지원한 회사가 자신을 불러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도록 잘 만들어진 이력서가 매력적인 이력서다.

지금도 구직을 위해 이력서를 작성하고 있는 많은 구직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이 신입 사원이든 경력 사원이든 간에 자신이 쓴 이력서를 읽어 보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한 번 불러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이력서인 지.

이력서는 신춘 문예에 보내는 작품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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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8 10:17 2006/04/2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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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과 이직에 관한 5가지 진실



이 글은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하되 모두 내가 직접 경험한 것에 기초하여 작성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왔고 다양한 직종과 다양한 규모의 회사에서 근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했다. 고로 내 경험에 대해 전혀 공감을 느낄 수 없다면 내가 아주 특별한 사람들만 만났거나 아니면 여러분이 매우 특별한 경험한 했다고 볼 수 있다.


착각 한국의 많은 남성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정상적으로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한 후 회사 생활을 시작했던 26살 때 내 주변 사람들 특히 부모님과 선배들은 내게 연봉과 이직(회사를 옮김)에 대해 진심이 넘치는 충고를 했다. 그들의 충고는 이런 것이었다.

- 첫 번째 회사는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최소 몇 년은 다닐 것
- 최초 몇 년은 일을 배우고 사회 생활을 배운다고 생각하고 일단 참을 것
- 신입 사원의 연봉은 어디나 비슷하니 봉급에 연연하지 말 것

나는 이 충고를 진지하게 듣기는 했지만 지킨 것은 하나도 없었다. 첫 회사에 들어가자 마자 1년이 지나지 않아 새로운 회사로 옮겼다. 그 때 나는 이 3 가지 충고가 모두 헛소리라고 확신했다. 만약 첫 번째 회사에 몇 년을 다니고 있었다면 회사에 불을 질렀을 지도 모를 것이다. 첫 회사에서 내가 배울 것보다 줄 수 있는 것이 더 많았고 첫 회사의 월급은 한 달 90만 원이었다. 두 번째 회사로 옮긴 후에 새로운 조언을 해 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 인맥을 튼튼히 쌓기 위해 잦은 이직은 좋지 않다
- 스카우트가 되어 이직하면 직급과 연봉이 급등한다
- 한 회사에 뼈를 묻으려는 생각은 옳지 않지만 안정적인 회사라면 그것도 괜찮다


나는 이 3 가지 조언을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인맥을 쌓기 위해 일주일에 6일을 술을 마셨고 스카우트가 될만한 훌륭한 인재가 되기 위해 하루 15시간씩 일했고 안정적이라고 불리는 큰 회사에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 결과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 증가와 파산 지경의 경제 상황과 만성 요통을 얻게 되었다. 물론 이직을 하며 직급이 상승했고 연봉도 올랐다. 그러나 연봉과 이직의 상관 관계에 대해 여전히 이해 안 되는 뭔가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봉급을 받으며 회사를 다니는 것을 그만두기로 작정한 후 내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며 특히 연봉과 이직에 대해 고민을 했다. 마침내 이런 충고와 조언들이 사실은 뭔가 큰 착각 속에서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깨달음을 몇 가지 주요한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었고 그걸 5 가지의 진실로 정리할 수 있었다. 왜 5 가지일까, 우선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5 가지 이상의 진실을 적는 건 세상을 너무 빤히 보이게 만든다. 이 정도만 기억하고 있어도 막연한 느낌의 세상살이에서 탈출하는데 충분하다. 다 적으려니 너무 길기도 했고.

연봉과 이직에 관한 다섯 가지 진실

하나, 잦은 이직은 경력 관리에 손상을 주지 않는다
대부분의 커리어 컨설턴트(헤드헌터나 직업 상담사)들은 잦은 이직은 경력 관리에 손상을 주며 결국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걸 점점 힘들게 만든다고 충고한다. 그리고 가급적 한 회사에서 특별한 경력을 쌓을 때까지 견디라고 이야기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자신이 원해서 회사를 그만 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사기꾼 사장을 만났거나 급여가 나오지 않거나 팀이 해체되는 등 회사 경영상의 이유로 이직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런 회사를 연속으로 3군데 다녔다면 어쩔 수 없이 이력서의 경력란이 화려해 질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이런 충고가 맞다, “짧은 재직 기간의 경력은 적지 말라” 특별히 어떤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단 기간에 근무했던 회사가 아니라면 경력 사항에 짧게 다녔던 회사는 기록하지 않는 게 좋다. 3년 간 7개 회사를 그야말로 전전했던 웹 디자이너의 이력서를 받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녀에게 왜 그렇게 많은 회사를 다녔냐고 묻지 않고 왜 그 회사들을 모두 적었냐고 물어 보았다. 그 회사 중 실제로 자신의 경력에 포함될만한 일을 한 회사만 이야기를 하라고 하니 2 개 정도였다. 다음부터는 2 개 회사에 대한 경력만 적고 나머지는 경력 기술서에 프로젝트로 나열하라는 충고를 해 주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많은 회사를 다녔을 때 그것을 스스로 어떻게 정리하는 가가 훨씬 중요하다. 속임수를 쓰라는 의미가 아니라 새롭게 취업할 회사가 알아야 할 것만 알려주면 그만이다.

대부분의 구인사들은 여러분이 100 번을 이직했더라도 무엇을 배웠고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 가에 더 큰 관심이 있다. 물론 100 번의 이직은 매우 특이하므로 그걸 다 적는 바보 같은 이력서를 제출한다면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둘, 일반적 이직은 연봉 상승과 별 관계가 없다
우리의 심각하며 고질적인 착각 중 하나가 이직을 하면 연봉이 인상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특별히 관련 직종의 평균보다 매우 낮은 연봉을 받고 있지 않다면 이직을 하면 연봉은 동결되거나 하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직을 하면 연봉이 오르거나 직급이 상승될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이유는 이직과 스카우트(scout)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직은 여러분이 어떠한 사정으로 더 이상 현재 회사를 다닐 수 없게 되어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것이다. 반면 스카우트는 멀쩡하게 회사를 다니고 있는 여러분에게 누군가 더 좋은 조건을 제공할 테니 함께 일하자고 제안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스카우트로 인한 이직은 연봉 인상과 직급 상승이 동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새로운 직원을 구하기 위해 이력서를 받다 보면 현재 연봉보다 받고 싶은 연봉을 높여서 제시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나는 이런 사람들과 인터뷰를 할 때 묻곤 했다, 지금 연봉보다 더 높은 연봉을 줘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들은 다양한 답변을 하곤 했는데 내 대답은 늘 같았다. 왜 이전 회사에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큰 착각에 빠져 있었다. 이력서를 낸 것은 구직자가 자신을 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니 가격 협상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만약 이직을 하며 연봉 협상을 하고 싶다면 회사의 구인 요구에 이력서를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안”을 해야 한다. 왜 구인사가 구직자가 이전에 다녔던 모든 회사의 연봉 인상률을 보전해 줘야 하는가?

셋, 연봉 외의 조건은 매우 중요하다
내 경우 이직을 할 때 기존 연봉보다 20% 인상 조건을 제시한 어떤 회사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 적이 몇 번 있다. 그리고 현재와 동일한 연봉을 제시한 회사에 취업을 했다. 이유는 회사의 지리적 요건 때문이었다. 전자의 회사는 출근 시간이 2시간 가까이 되었다. 반면 후자의 회사는 그 절반도 되지 않았고 집 앞에서 바로 탈 수 있는 버스가 자정 넘도록 다녔다. 20%의 조건은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하루 2 시간의 출퇴근 시간을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이런 기준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유가 뭐든 간에 시간보다는 급여가 우선이거나 광적으로 차 타기를 즐기거나 뇌호흡 수련 시간이 부족하다면 하루 왕복 4 시간이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도무지 직장을 구하지 못해 오랜 시간 실업자로 지내야 했다면 4 시간이 아니라 기숙사 생활을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지 모른다. 이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이직은 연봉이라는 단순 함수 관계로 계산할 수 없는 다양한 요소가 존재한다. 또 다른 예제는 회사에 대한 평판이다. 급여도 잘 나오고 회사의 매출 구조도 안정적이지만 업계의 평판을 들어보니 이 회사 직원들은 이직이 매우 잦다고 한다. 좀 더 조사를 해 보니 회사 근무자 90%의 평균 근속 연수가 1년 미만이다. 여러분이 그 90%에 속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때만 이직을 해야 할 것이다.

넷, 이직과 인맥 고리는 별 관계가 없다
스카우트를 통한 이직이 잦다면 연봉은 계속 인상될 것이다. 어떤 경우엔 사장보다 더 높은 연봉을 받을 수도 있다. 스카우트를 통한 이직은 인맥을 약하게 만들기 보다는 오히려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소위 잘 나간다는 사람에게 꼬이는 게 인맥 아니던가. 그러나 대개의 경우 잦은 이직으로 인해 인맥 고리가 약해질 수 있다는 조언을 하고 그런 예도 흔하다. 그럼 이직을 하지 않고 꼬리뼈에서 뿌리가 돋도록 한 회사에 있는 것이 인맥 고리를 강화시킬까?

내가 아는 어떤 사람들은 짧게는 2~3년 길게는 5년 이상 한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벤처 혹은 IT 업계에서 이 정도 기간을 한 회사에서 근속하는 것은 굉장히 드물고 심지어 존경할만한 일이다. 이들은 튼튼한 인맥 고리를 갖고 있을까?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최근에 오랜 기간 한 회사에 근속하다 이직을 한 어떤 사람이 내게 이직 과정에서 느낀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자신의 인맥이 생각했던 것보다 협소했고 어려운 시기에 큰 힘이 되지 못해서 난감했다는 것이다.

인맥 고리의 형성은 순전히 자신의 성향과 가치관에 달려 있다. 어떤 회사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넓고 튼튼한 인맥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인맥 고리를 형성하려 노력했는지 그것이 중요하다. 이직이 잦을수록 인맥 고리가 약해지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당신의 인맥은 회사 관계뿐인가?”

직급이나 회사 직무 혹은 회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인맥 고리는 그 회사를 그만두는 순간 파괴되기 마련이다.

다섯, 연봉으로 부자 될 생각을 버려라
지금 연봉이 3 천 만원이고 이직을 통해 33% 이상 인상된 4 천 만원을 받게 되었다고 치자. 냉정하게 계산을 해 보면 한 달에 83만 3천 원을 더 받게 된 셈이다. 그러나 연봉이 인상되면 세금도 따라 오르고 4대 보험도 덩달아 오른다. 실 수령액 기준으로 아마 운 좋으면 60만 원 정도를 더 받게 될 것이다. 이 돈으로 뭘 할까? 나는 부모로부터 지원 받은 기초 자본이 없는 사람이 봉급으로 적금을 붓고 아파트를 사고 아이를 양육하고 그리고 부자까지 되려는 시도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그렇게 살려고 작정을 했다면 부자가 되려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패륜적 돈 버는 개념잡기 책을 썼던 로버트 기요사키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주목할만하다. “봉급쟁이가 부자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기 보다 어렵다”

더구나 연봉은 일정 수준 이상 오르지 않는다. 통계 자료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주변을 둘러 보라. 웬만한 벤처 기업의 이사급 연봉도 5천 만원이 되지 않는다. 더 높은 금액을 받고 싶다면 몇몇 큰 기업으로 옮겨 가는 수 밖에 없다. 그런 자리로 옮겨 가느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9급 공무원 준비를 하는 게 현실적인 방안이 될 수도 있다. 더구나 연속된 스카우트가 아니라 단순 이직이라면 연봉으로 부자 되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접는 게 낫다.

이직을 할 때 연봉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옮겨 가려는 회사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 가를 알 수 있는 가장 평이한 척도이기 때문이다. 또한 최소한 하락하지 않은 연봉 수준은 여러분의 이직을 만족시켜 줄 것이며 애사심을 고양시킬 수 있다. 연봉이 오른다면 그것으로 인해 더 높은 책임감을 갖게 되고 능률을 배가시킬 지도 모른다. 그건 그거고 연봉으로 부자 되겠다는 착각은 착각이다.

끌어온곳 : [param, 2006/04/25 13:04]
원출처 : http://www.zdnet.co.kr/itbiz/column/anchor/bluemoon/0,39032576,39145033,00.htm
저자 : 이준영 (트레이스존 대표)



이직과 연봉에 관한 오피스 정글은 이러하다,

“사자가 자기 터전을 떠나는 경우는 단 두 가지뿐이다. 도전자에게 쫓겨 났거나 더 이상 먹이가 없을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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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8 09:37 2006/04/28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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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는 딸을 타겟으로 이야기 하지만
반대로 남자 입장에서 보면 기술되어 있는 내용중
자신의 단점을 고치기만 하면 되는 메뉴얼 같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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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 이런 사람과 결혼하지마라

아침 잠이 많은 남자와 결혼 하지마라
아침에 게으른 사람이 오후에 부지런한 사람은 없다.

배 나온 남자와 결혼 하지마라
자기 관리를 하지 않은 사람이
가족을 부양하는 의무를 성실히 한다는 걸 본 적이 없다.

물건을 집어 던지는 사람과 결혼 하지 마라.
나중에는 사람을 집어 던지기도 한다.

부모에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과 결혼하지마라.
부모에게조차 그렇다면 너까지 오는데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효성은 시대와 상관없이 훌륭한 인품이다.

느린 팔자걸음을 걷는 사람을 조심해라.
네가 벌어오고 먹여줘야 할지도 모른다.

친구들 앞에서 면박 주는 걸 재미있어 하는 사람과 결혼 하지 마라.
터무니없는 이유로 헤어지기 쉽다.

여러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을 경계하라.
부적절한 관계로 인한 끊임없는 괴로움을 겪을 수 있다.

연락을 하기 전엔 연락하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지 마라.
사랑은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온다.

긴가민가하는 사람과 결혼 하지마라.
이 사람 아니면 살 수 없었던 사람도 헤어질 수 있다.

성공한 사람을 너무 기대 하지마라.
한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면 인생을 안이 하게 살았다는 증거다.

'넌 가만히 있어' 라고 자주 말하는 남자와 결혼 하지마라.
편하게 가만히 살기보단 그냥 가만히 살게 된다.


딸아!

다정한 사람을 만나 결혼해라.
너를 굶기지 않을 정도의 돈을 벌고
가끔 꽃을 사주기도 하고
주머니에 따뜻한 커피를 숨겨 놓고
아내를 기다릴 만한 남자를 찾아라.

[param, 2006/04/28 08:18] Param님 블로그에서 가져 왔습니다.
param님도 어디선가 퍼온것 같은데, 출처가 없는 관계로 param님 URL만 걸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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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8 09:09 2006/04/28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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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이 없으면 진보도 없다.
권력은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양보하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프레드릭 더글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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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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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7 09:56 2006/04/2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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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스리는 32가지 방법


1. 울고 싶을 때는 크게 운다.
2. 자기 자신과 타인을 심판하지 않는다.
3. 마음에 어떤 공간을 남겨두고 그 곳에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넣어둔다.
4. 고민스러울 때는 심하게 고민한다.

5. 앞으로 일어날 것 같은 일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
6. 가슴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7. 하루에 한 번은 조용한 시간을 갖는다.
8. 마음의 눈에서 두려움의 안경을 벗어 던진다.

9. 과거의 상처들에 대해선 한바탕 운 다음에 그것들로부터 벗어난다.
10. 어떤 선택들이 가능한지 스스로에게 말해 준다.
11. '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돼' 라는 것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킨다.
12. 자신을 주장하되 부드럽게 주장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13. 자신에게 기다림의 기술을 가르친다.
14.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15. 오늘이 자기 자신에게 하나의 모험이 되게 한다.
16. 마음에 와 닿는 모든 느낌들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17. 마음이 내린 결정을 지지한다.
18. 마음속에 있는 순수한 어린아이를 소중히 여긴다.
19. 생각 속에서 남을 비판하려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는 그것을 침묵시킨다.
20. 삶의 조화와 균형을 생각한다.

21. 마음속에 유머를 나눌 공간을 늘 남겨 둔다.
22. 때로 자기 자신에게 놀라운 기쁨을 안겨 준다.
23. 새로 피어난 꽃들로 자신의 집 안을 장식한다.
24. 완벽해지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자신에게 말해 준다.

25. 마음이 들려 주는 교훈에 귀를 기울인다.
26. 어떤 순간이든지 그 순간에 몰입한다.
27. 괴짜가 되어 행동하는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
28. 폭포의 근원을 알기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모험을 과감히 시도한다.

29.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얼마나 큰변화의 힘을 갖는가를 기억한다.
30. 자신에게 시를 한 편 써서 읽어 준다.
31. 자신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능력을 높이 인정한다.
32. 이제 막 내린 눈 위를 달빛 아래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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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기분이 어찌이리 기복이 심한지, 마음을 다스려야지.. 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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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1 00:55 2006/04/21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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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So why did I drop out?
왜 자퇴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그 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지금 뒤돌아보면 참으로 힘든 순간이었지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자퇴를 하니 평소에 흥미없던 필수과목 대신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또 매주 일요일,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헤어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Let me give you one example: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배웠는데, 서로 다른 문자끼리 결합될 때 다양한 형태의 자간으로 만들어지는 굉장히 멋진 글씨체였습니다.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인 것이었고, 전 그 것에 흠뻑 빠졌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사실, 이 때만해도 이런 것이 제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될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매킨토시를 처음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아마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아니였나 생각합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인쇄술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제 인생의 고비 때마다 힘이 되워줬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잘 맞는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은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엄청난 일들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세상이 당신을 속일지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쇼.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만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앞에서는 모두 밑으로 가라앉고, 오직 진실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 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당장 죽는 건 원치 않습니다.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다 죽을 것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삶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이란 삶의 또다른 모습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단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잡음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엄지들고 차를 유혹해서 빌려타며 여행하는 것/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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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Stanford Link
VIDEO : http://news-service.stanford.edu/news/2005/june15/videos/51.html
REPORT : http://news-service.stanford.edu/news/2005/june15/jobs-061505.html
wiredat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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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8 09:34 2006/04/18 09:34